Abstract

Translation Text
웅변가 안티폰(Antiphon)은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411년 과두파의 쿠데타(oligarchical coup)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로 유명하다. 민주주의가 복구된 후, 안티폰은 반역죄로 재판에 처해 사형선고를 받는다. 1 한편, 정계에 발을 들이기 전 안티폰이 무슨 일을 하고 살았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그는 일종의 정신분석가였다. 슈도-플루타르크(Pseudo-Plutarch) (3-4세기 AD)는 영웅전(Lives of Ten Orators)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폰이 아직 시(poetry)에 몰두할 무렵 그는 마음의 괴로움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의사에게 신체질환을 치료받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방법이었다. 그는 코린트(Corinth) 아고라 근처에 개원을 하고는, 말을 통해 괴로움을 낫게 하는 치료법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그리고 그를 찾는 환자들의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함으로 그는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이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웅변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833c-d)
나는 이 짤막한 일화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인간의 삶에는 정신분석 (내지는 그와 비슷한 그 무엇)을 자꾸만 찾게끔 하는 압력이 내재된 동시에, 이 힘을 거부하는 내면화된 사회적 압박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신치료보다 웅변이 보다 자신의 품위에 걸맞다는 결심은, 결국 법대에 진학하기로 마음먹는 행보의 기원전 5세기 버젼이다.
오늘 나는 프로이트의 저술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신분석의 외면이 발견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격을 높이려고 애쓰는 시점에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이 불러온 지적 혁명과 나란히 비교한다.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며,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순진한 자기애는 두 가지의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첫째는 우리의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상상이 힘들 정도의 광대한 우주 시스템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일 뿐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발견은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과 연결되어있다. … 두 번째 타격은 생물학적 연구결과 사람의 조상이 동물임이 밝혀지고, 따라서 사람의 동물적인 근본이 부인의 여지 없이 증명되어 피조물로써 인간이 차지한다고 간주되었던 특별한 위치가 무너진 것이다. 이 재평가는 다윈, 월러스, 그리고 그들의 전임자들에 의해 바로 우리 시대에 이루어졌다… 한편 인간의 과대망상이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볼 수 있는 세 번째 발견은, 우리의 자아마저도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자족해야 하는 상태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현재의 심리적 연구에서 올 것이다. [프로이트 1916-1917, pp. 284-285; 프로이트 1917, p141도 참조]
정신분석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유사하다는 주장은, 그 전임자들이 갈피를 못 잡고 깊은 오해에 빠진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그들을 무시해도 좋다고 용인하는 셈이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이 부분이 불편하다. 첫째,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자체가 아니라, 역사 속 정신분석의 마땅한 위치를 논하고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어떻게 계승되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지, 그가 논할 바가 아니다. 둘째, 지적 혁명이라는 구호는, 본의 아니게 일종의 역사의식에 대한 억압을 야기하는 수가 있다. 역사적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우리는 다양하게 창의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과거 유산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게 된다. 나는 이 현상이 이미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지금 할 이야기로 나는 어떤 기억을 되살리고자 한다. 우리의 역사의식의 일부가 되어야 할 기억이다.
고대의 심리학 (Psychology in the Ancient World)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행복한 인생이란 자신의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할 기회가 주어지는—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영위하는—활동적이고, 윤리적인 삶이라는 통찰을 공유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심리학을 창시하였다. 윤리적(ethical)이라는 말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사회적 관습과 실제(social customs and practices)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 우리가 익숙한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윤리적 삶은 초자아의 개입이 필요없으며, 가장 좋은 인간의 삶의 모습에서는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생각이기도 했다. 행복한 인간의 삶에는 가치관과 목적의식이 스며있을 것이나, 이는 비판적 초자아가 순종적인 자아에 배치된 결과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한(wholehearted) 삶일 것이며 통합된 정신(integrated psyche)의 발현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정신통합은 건강의 조건이었다. 플라톤은 정신통합이 건강한 인간의 상태임을 입증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정신역동적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인 심리학을 설립하였다. 진정한 통합은 사실 흔치 않을 수 있고, 즉 건강은 성취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목표일 수 있으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를 진정한 인간의 가능성으로 확신했고,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건강하고, 충만한 삶에 가장 끈질긴 걸림돌은 바로 자아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the ego is not “master in its own house”)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성은 욕망에 의해 자주 번복되며, 그 시각도 왜곡된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무의식적 욕망(unconscious desire)에 대한 이해도 있었는데, 그는 꿈이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의식하지 못하는 천방지축 욕망들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국가론 IX 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들 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우리가 잠들어있을 때, 영혼의 나머지 부분—이성적이고, 온화하고, 통치하는 요소들—이 자는 동안, 깨어나는 무리들이다. 먹고 마시기를 갈망하는 동물적이고 야생적인 부분이 살아나며, 잠을 떨치고, 자신들 특유의 본능을 충족시키고자 나선다. 알다시피, 수치심이나 지혜로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운 이 상태에서 이들은 그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환상 속에서 그들은 사람, 신, 짐승 가리지 않고, 어머니나 그 누구와도 성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 어떤 불온한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이고, 마다할 먹이가 없다. 한마디로, 아무리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이들은 자제하지 않는다. 2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심리학이 창시될 당대의 상황은, 사실 프로이트가 우리의 전임자들에 대해 주장한 바와 정 반대이다. 초대 심리 이론가들은 자아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점을 그 무엇보다 유념하고 있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디언 정신분석은 분명 인간조건(the human condition)을 여러모로 획기적으로 조명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희화화된 인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또한, 긴 세월에 걸쳐 이어져온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비전에 정신분석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이해하려면, 그 비전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풍요롭고 충만한 삶에는 조화롭게 기능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았지만, 바로 그러한 조화로운 마음의 통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적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는데,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의 통찰이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옥스포드 번역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에 비이성적인 “요소”(element)가 있어 보인다고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말한 바는, 마음에는 비이성적이나 일면 이성에 참여하는 또 다른 성질(nature)이 있다는 것이다. 3 영어로 “정신의 또 다른 성질”(“another nature of the psyche”)이라는 문장은 어색하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성질”(nature)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정확한 의미가 있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성질은 그의 내적 변화(와 휴식) 원칙(inner principle of change (and rest))이다. 4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신에 비이성적인 성질이 있다고 할 때, 그는 정신의 비이성적인 부분이 그 자체의 활동 원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통찰인데, 내 생각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꽤 단순한 관찰을 통해 깨달았을 것 같다. 우리가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두렵거나, 질투하거나, 우울할 때, 우리의 감정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얻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 예를 들어, 우리의 질투가 아무런 이성적인 근거가 없다고 알면서도 그 질투는 우리를 장악하고 특유의 내적 원칙에 따라 전개되는 수가 있다.
이 통찰덕분에, 정신통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복잡해진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에 대해 “통일”, 또는 “조화”, 또는 “통합”라는 단어를 사용 할 때, 우리가 과연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의 사안은 더 이상 이런 저런 금지된 소망(forbidden wish)의 통합 여부가 아니라, 자체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마음의 한 부분을 나머지 마음에 통합시키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통합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마음의 각 부분들은 각자의 목소리가 있고,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비이성적인 부분들과 이성적인 부분들이 통합을 이루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homophoneo). 이러한 정신통합의 상태에서 비이성적인 부분은 이성적인 부분에 보다 귀 기울일 수 있다(euekooteron).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정신내적 소통의 본질에 대하여 비중 있는 말을 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바로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도덕적 심리학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암시와 비유를 제시하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혼잣말을 해본다: 안티폰이 개원을 접은게 참 아쉽구나! 정신의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바로 그가 제공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맥락에서 정신분석의 의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고대그리스의 유산을 계승하기에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데, 즉, 마음의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서로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상세히 밝혀줄 활발한 심리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기법(Psychoanalytic Method)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에 착안하게 된 것은 내 생각에 거의 기적이다. 최대한 검열이나 억제 없이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도록 노력하라는, 정말 간단한 규칙인 반면, 그가 당면하고 있는 환자들의 요구를 감안했을 때 참 의외의 대처이다. 사람들은 온갖 신체이상, 강박행동, 고문, 살인, 자살에 대한 강박사고를 호소하며 그를 찾았다. 이 방대한 호소에 동일한 처방이 통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게다가, 얼마나 이상하고 묘한 치료기법인가!
프로이트는 자신이 근본 규칙을 거의 우발적으로 발견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이 최면을 잘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자조적 설명은 정말 유머가 묻어난다. 5 한편, 착안하게 된 경위가 어쨌건,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은 정신분석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이어온 전통에서 정신분석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이다. 나는 정신분석에 새로운 독단주의나 맹목주의를 도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을 적용하기 어려운 환자들과 훌륭한 정신분석적 성과가 이루어졌다고 잘 알고 있다. 나의 의도는 무언가를 배제하고자 함이 아니라,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이 정신분석의 맥(heartbeat)이 되어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근본 규칙으로부터 멀어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래야 하겠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바람직하겠다.
근본 규칙을 정신분석의 근본이라고 보아야 하는 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가 자유로운 자의식의 흐름(the free flow of self-consciousness)이라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가지 정의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지닌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개념은, 사고의 영역에서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자유롭게 누빌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에 생각이 따르도록 하겠지만, 만일 우리가 마음이 혼자 흐르도록 둔 채 그 내용을 그대로 말하도록 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의 자유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근본 규칙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여파가 상당한 경험적 발견이다. 6 프로이트가 썼듯이 (1913) “모든 분석에는 환자가 근본규칙을 무시하는 시점이 온다.” (p134-135 n.1) 내 경험상 이 시기는 분석이 시작하자 마자 오고, 분석과정 중 꾸준히 나타난다. 그렇다면 자의식의 즉흥적인 전개에는, 동시에 이에 반발하는 성질이 내재되어있다고 의심해볼 수 있다. 마치 마음이 자신의 자유에 스스로 방해가 되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실증 결과나, 최종 효과 연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정신분석적 상황의 구조만 보았을 때, 우리는 이미 정신분석이 자의식의 협착(constrictions)에 대한 “치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란 단지 우리가 지닌 다양한 정신 기능 중 하나에 지나는 것이 아닌 만큼,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조건 중 하나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이해하는 자의식적인 참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자의식적 파악을 할 필요가 수반된다. 창의적인 자의식이 제약된 정도로, 삶도 제약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 강박적인 통제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역시 삶이 충만하지 못하게 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다만 인간의 자의식에는, 자유롭고자 하는 성질이 내재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근본 규칙을 정신분석의 근본으로 보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에 당도한다. 마치 근본 규칙을 적용하는 행위 자체가 그 규칙에 대한 저항과 지장을 유발하는 듯이 보인다. 이는, 근본 규칙의 적용이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흐를 수 있는 반투과막을 형성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피분석가가 마음에 떠오르는 그대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노라면, 이 흐름은 불가피하게 다른 생각의 침투나 말실수 등에 의해 방해받게 된다. 즉, 무의식이 의식 내로 뚫고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의식 특유의 목소리를 상세하게 들어볼 특별한 기회를 얻는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직감했던 바도 입증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프로이트의 최고 업적은 무의식적 정신활동의 특수한 원리를 상세히 그려냈다는 것이겠다. 프로이트 왈, “종합하자면, 상호모순논리의 무시(exemption from mutual contradiction), 일차 사고(primary process) (카텍시스의 기동성(mobility of cathexes)), 무시간성(timelessness), 그리고 외부현실이 정신현실로 대체되는 점– 이들이 시스템 무의식 (System Ucs) 의 작동 과정에서 발견할 법한 성질들이다.” (1915, p. 187) 요약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신의 비이성적인 부분이 특유의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을 파악하였다면, 프로이트는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비로소 밝혀냈다.
지난 한세기 동안 정신분석의 발달은, 우리가 줄곧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낯선, 일종의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생각에 좋은 해석(interpretation)이란,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사람 전부를 아울러야 하고, 한편 무의식이 그 고유의 방식대로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정신분석은 그 사람과 가장 깊은 수준의 대화를 하고자 하며, 이로써 마음 전체와 온전히 소통하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 뿐만 아니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 등 몇가지 묵직한 내용들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에 초점을 다시 두면, 어떤 특정 발견이나 내용적 결과에 대한 치중보다는, 과정이나 방법론이 강조된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고 주장하려면, 적합한 방법을 통해 그 내용이 매번 재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 정신분석이 자의식의 확장 능력(capacity for self-conscious awareness)을 기르는 것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종전까지는 유리창 너머 어슴푸레하게만 인식되었던 정신활동의 영역까지 자의식적 이해를 확장하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마음 전체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신분석이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의 계승, 또는 실현으로 보인다.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마음 전체를 돌보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라고 한다. 7 이는 다음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의 건강은 여타 동물의 건강 개념과 다른데, 사람의 건강은 사유없이(thoughtlessly) 이룰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건강하려면, 우리는 건강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반하여 건강에 필요한 조건들을 능동적으로 실현해내야 한다. 플라톤은, 이 점은 그 무엇보다도 정신 통합을 이룰 때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자아가 상당부분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사유가 전제 된 개입이 있어야 한다
자,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한 인간 이성의 역할 이야기를 낡아빠진 구식 심리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 과연 정신 기능 중 이성이라고 칭할만한 것이 있다고 누가 생각할까. 사람 마음에 대한 이런 오해야말로, 프로이트가 바로잡고자 한 인류의 또 하나의 자기애적 착각 아니었나? 한편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다르게 계승하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이미 이성이 무엇인지 안다고 판단하기에 앞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몇몇 표식을 세워놓은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이라는 용어는 가주어(placeholder)인 셈이다. 이성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가 “이성”이라고 말할 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려면, 마음 전체에 대하여 사유하는 책임을(thoughtful responsibility)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아야 한다. 이 보완된 시각으로 다시 조명해보자. 이성이란 무엇인지, 이성이라고 하는 기능의 행사가 무엇을 포함하는지 깨달을수록, 이성이 무엇인지 점차 알게 될 것이다.
거울을 한번 볼 시간이다. 우리들의 정신분석적 활동을 근본 규칙에 입각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생각하는 자의식의 확장을 통해, 최대한 다양한 영역의 정신신체기능을 포함시키고, 이해하고, 그로써 통합하는 활동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한편, 진정한 정신 통합의 촉진을 위해, 사유하는 자의식을 확장을 수행하는 마음의 능력을 바로 이성이라고 한다면, 정신분석은 단지 인간 이성의 활동이라는 결론을 어떻게 면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정신분석의 코페르니쿠스적 환상에 걸맞는 인간 이성 해체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인간 이성인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분석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이성의 실제적인 적용을 통해 이성을 실현하고 있고, 소크라테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은, 그가 제기한 근본 질문에 대한 풍성하고, 사유하는 응답이 가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정신분석으로, 자신의 질문에 대한 탐구는 영혼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부응하는 마음 활동을 구축한 셈이다.
누가 알았을까? 한편, 우리는 왜 알지 못했을까? 정신분석이 인간 이성의 전형적인 발현이라고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내 생각엔 오직 역사적 우발 사태들 때문이다.
진실과 정신통합 (Truth and Psychic Integration)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이 그야말로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세번째 이유는, 정신분석 작업은 이 근본 규칙을 따르려는 노력 가운데 정신분석의 근본 가치, 즉 진실됨(truthfulness)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설명을 더 해야겠다. 오랫동안, 왜 진실이 치유를 할 터인지, 의문이었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누군가에 대한 사실을 그에게 말해주는 것은 치유는커녕 반발, 증상 악화, 치료 중단 등 각종 반응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았다. 8 물론 우리는 단순한 사실(fact) 이상의 진실 개념이 필요하다. 심지어, 진실이 곧 치유인 진실 개념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옥스포드 영어 사전은 진실됨(truthfulness)을 우선 충실함(fidelity)에 기반하여 정의한다. 누군가 진실되다는 것은 “사람이나 원칙, 또는 사회정의에 대해” 진실되다는 것으로, 이는 “믿음직함, 충실함, 충성함, 일관됨, 흔들림 없는 동맹”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자기 자신에게 일관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다음의 한가지 답을 해볼 수 있다: 자신을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에 꾸준히 입각시키고, 불가피하게 실패하는 부분은 분석하는, 분석적인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 정신분석적 작업을 해오며 배운 것이 있다면, 근본 규칙에 따라 마음을 말로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정신 통합적인 활동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의식적 의식의 확장 능력을 계발하는 것은, 그 동시에 마음을 통일하는 활동인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진실됨이다: 정신 통합이 진행되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충실해지는 것이다. 근본 규칙에 입각한 정신분석 활동 그 자체가 진실됨의 발현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진실됨 자체가 곧 치유가 된다: 즉 이렇게 스스로에게 충실해지는 것은 일종의 정신 통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되다고 할 때, 또는 정신 통합 또는 정신통일이라고 할 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의 이해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것 같다. 분명 이에 대해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바도 크지만, 동시에 과제도 던져준 셈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칭한 정신의 비이성적인 부분은 고유의 특이한 활동 및 변화 원칙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과연 정신 통합이란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다. 통합은 단지 관용뿐이 아니라, 특정 무의식적 정신활동의 촉진과 증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정신통합이 무엇을 포함하는지 배울 점이 아직 많고, 내 생각에 정신분석은 이를 밝히기에 특별한 위치에 있다.
임상삽화 (Clinical Vignette)
다음의 짤막한 임상 삽화는 많은 분석 상황 중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법한 장면이다. 이 삽화를 통해 나는 근본 규칙에 따른 정신분석 작업에 의해 성장하게 되는 마음의 힘이나 역량을 보여주려고 한다. 정신분석은 아마도 각종 경로로 치유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분석의 단일 치료작용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군의 치료기전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적인 정신분석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어떤 특별한 마음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고보니 –이 또한 경험적인 발견인데–근본 규칙에 따른 자의식적 의식(self-conscious awareness)의 전개는 단순한 전개가 아니다. 이는 특정 정신 근육을 키우는 일종의 정신 운동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모양을 바꾸기 위해 그 근육들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도 키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성은 그 자체의 자의식적 효력(self-conscious efficacy)이 있다.
이 과정에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근본 규칙으로 구축된 반투과막을 뚫고 드러나는, 무의식의 세세한 특성들을 갈수록 익히게 되는 점이다. 이러한 침투를 단지 더 능숙하게 인식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석가와 피분석가는, 뚫고 들어오는 무의식의 목소리와 적극적으로 자의식적 효력을 갖춘 대화를 할 줄 아는 능력을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이가 일어나는 가운데, 무의식은 정신분석의 지금 여기 현장(here and now situation)에서 목소리를 내게 된다는 점이다.
B씨는 오 년째 나와 정신분석 중이다. 그는 성공한 학자로, 자신의 분야에서 더 수련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이다. 그는 나에 대해 연상한다: 그의 눈에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으로 비친다. 그는 그 전날 밤의 꿈을 보고하기 시작한다.
나는 빨간 불을 지나는 차들을 보고 있어요. 그들은 계속 통과해요. 난 몇 가지 반응을 합니다. 저들은 아무 처벌 없이 달아나잖아. 그러면 안돼. 화가 나요.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나도 별탈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특히 마음에 남는 건, 그러고도 그들은 괜찮았다는 거에요. 사고도 없고, 경찰 사이렌도 없어요.
그는 바로 꿈에 대해 연상하지 않고, 일 관련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그는 연수 받기로 한 프로그램 이야기로 옮겨간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어 설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 같은 과정을 이미 밟은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했었는데, 그 친구는 B씨가 이 프로그램을 예전에 다른 강사진이 가르칠 때 하지 않은 것이 정말 아쉽다고 했다. 그러고 B씨가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꿈들을 꾸나봐요. 다른 차들이 빨간 불을 쌩쌩 통과하는 것을 바라보는 꿈 말이지요. 나는 그러고있지 않거든요. 화가 나요. 내가 바로 파란 불에 멈추는 사람이에요. 심지어 노란 불에도 멈춰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그러고도 괜찮단 말이에요.
나는 그의 말실수가 놀라웠다. 반면, B씨는 모르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이 무의식이, 근본 규칙에 의해 형성된 반 투과막을 뚫고 나와, 고유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순간이다. 나는 말했다. “자신이 파란 불에 멈추는 사람이라고 했네요.”
이에 B씨는 대답했다: “아니요? 내가 그렇게 말한 줄 몰랐어요. 오늘 당신이 내려오기를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참 설레는 일들이 많네, 그런데 왜 난 기분이 가라앉아있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파란 불은 전진 신호인데, 나도 모르게 정지하고 있어요. 나는 여기서 멈춰버려요.”
짧은 순간이지만, 연상을 하면 할수록 B씨는 여기에 하나의 세계가 반영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전화했던 친구가 아마도 그 프로그램을 비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전화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시작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수련과정을 즐기고 있는 그녀를 질투하는 마음도 들었다. B씨는 그 친구가 사는 지역으로 이사해서 그녀와 똑같은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살아오며 자신이 파란 불에 스스로 멈춰버린 여러 경우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이 막아버린 여러 기회들 말이다. 의식적으로는, 빨간 불에 멈추지 않고도 잡히지 않는 사람들, 즉 유유히 빠져나가는 듯한 사람들을 질투하고 분노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이 매번 파란 불을 두고 경계하며 머뭇거리고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이는 무의식은 시간을 모른다고 프로이트가 말한 부분이다. 형식에 있어서의 무시간성(timelessness of form)인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역사와 인간 성장은 쑥쑥 전진하나, 무의식적으로 B씨는 파란 불로 보일 수 있는 사건이나 기회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들을 짙은 의혹에 감쌌다. 성공의 가능성 앞에서 그가 자신을 제한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반복으로 보일 수 있다. 같은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무의식이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능동적으로 형태를 부여한다고 생각해보면—이 경우, 파란 불 앞에 망설이고 빨간 불을 지나는 타인들을 질투하는 구조이다—이 체계는 시간이 없는 공간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기억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은 그 자체의 성질(nature), 고유의 활동 원칙이 있다고 했었다. 여기 이 소우주 내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상세한 무의식적 정신 활동의 원리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치료적 개입의 기회이면서, 난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B씨가 당면한 어려움은 이런 저런 무의식적 소망(wish)이나 공포가 아니라, 그의 인생의 모양을 결정지은 정신 기능의 작동원칙인 것이다. 자의식적 이성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흐르는, 이토록 정교하게 짜인 정신활동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개입을 할까? 이렇게 정신활동의 형식을 결정짓는 원리를 정신분석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B씨의 경우, 빨간 불/ 파란 불 체계가 전이에 나타난 경위는 다음과 같다. 현재 당면한 파란 불은 학술연수를 더 받는 선택에 대한 것이었다. B씨가 보았을 때 나는 같은 학자로 파란 불을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뿐 아니라, 아마도 빨간 불도 지나치고, 단 한번도 잡히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수련을 하면 분석시간이 줄 수도 있으니 내가 반대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이점 때문에도 B씨는 경계했다.
어느 쪽이건 그는 꼼짝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나는 지적했다. 상황이 빨간 불이라고 해보자. 그는 스스로에게 차마 실행을 허락하지 않는 답답하고 감질나는 생각들로 가득 찬 채, 빨간 불을 통과하고도 유유히 벗어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을 줄곧 질투한다. 또는 파란 불이면,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실망할까 두려워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는 나를 질투, 원망과 부러움의 눈길로 보며, 나는 빨간 불과 파란 불 모두 통과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점에서 B씨는, “아, 내 자신이 그냥 파란 불을 통과하게 둔다는 건 어떤 걸까요!?”라고 했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고, 여태 세차게 비비고 있던 그의 손은 긴장이 풀렸다. 그의 몸은 전반적으로 이완되는 모습이었다. 마치 B씨가, 몸과 마음 모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듯 하였다.
물론 B씨가 이 말을 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일 수 있고, 말의 내용만으로 B씨가 어떤 식으로 이 말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나도 그가 어떤 식으로 이 말을 했다고 완벽히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한번 제안은 해보려고 한다.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B씨가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표면적으로 B 씨는 어떤 소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주저 없이 파란 불을 통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한편 몇 년에 걸친 정신분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단지 소망의 표현뿐이 아니라, 가상의 만족이나, 가상의 실망 이상의 무엇을 일으켰다. 나는 긴 분석과정을 통해, B씨가, 소망을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자신의 마음 활동이, 동시에 신호등을 지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락을 해주는 행위가 되도록 하는 마음의 어떤 역량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즉, 정신분석은 단지 소망을 수렴하여 표현할 줄 알게 하는 능력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표현의 행위가, 소망(wish)이 그가 집행할 수 있는 실행욕구(desire he could act upon)가 될 수 있게끔 했다. 그의 행위는 자의식적 정신의 영역(realm of the self-conscious mental)의 활동이다. 자신의 자의식적 이해가 지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효력으로, B씨는 그의 인생의 차선들을 개방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또 하나의 신호등 앞에 당면한 상태임을 인식할 줄 아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로 훈습(working through) 과정이다. 이는 삶의 세세한 사건사고들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파악한 후에는 효과적으로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다. 훈습은 일반적으로 수년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 과정을 통해 피분석가가 마음의 분석적 힘을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이 마음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더 알 필요가 있다. 한편 이 힘의 특징 중 세가지는 이미 밝혀졌다. 첫째, 이 마음의 효력은 자의식적(self-conscious)이다. 지금 바로 허용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적인 이해를 통해, 자의식적 마음은 진정한 효력을 지닌 허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자의식적 이해는, 그 이해하는 바의 실현에 있어 인과적인 효력이 있다. 10 둘째, 이 상황에서 자의식적 효력이 가능한 이유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효과적으로 소통 중이기 때문이다. 분석상황에서,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의식은 협동하여, 근본 규칙이 세운 반 투과막을 뚫고 드러나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 경우, 빨간 불과 파란 불이라는 단어들을 두고 한 말실수가 되겠다. 자의식적 마음의 효력이 그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바로 그 상황자체가 동시에 자의식과 무의식의 통합활동(integrating activity)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자면, 자의식이 효력을 지닌 이유는, 이 경우, 현재 자의식이 무의식과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마음의 이 역량을 키우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이는 정신기량의 계발로, 삶을 장악하고 있던 무의식적인 체계들을 바꿀 수 있는 자의식적인 마음의 힘이다.
결론
나는 이 글에서 꾸준히 “무의식의 발견”보다는 의식적 자의식의 힘과 확장을 강조했고, 정신분석으로 밝혀냈다고 알려진 그 어떤 결과 내용 보다는, 정신분석적 기법 또는 기전을 우선시했으며,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계가 스스로에게 해온 이야기와 사뭇 다른 전통의 맥락에서 정신분석의 위치를 고찰해보았다. 나는 여기서 직설적인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
일단, 우리가 단일 서사(narrative)에 갇혀있지 않으며,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결정하는 데에 움직일 여지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한편 내가 해온 이야기는 정신분석에게 중요한 기회를 열어주는 동시에, 정신분석이 지고 있는 독특한 책임을 명시한다. 우리가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토대로 이루어진 서양의 사유에는 두 갈래의 큰 흐름이 있다. 첫째는 도덕이라고 한다. 법과 책임, 권리와 의무, 빚, 죄의식 그리고 보상에 기반한 사유 형태이다. 도덕의 틀에서 우리가 서로와 맺는 관계는, 서로에게 진 채무관계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11 물론 이 체계는 장점이 많이 있겠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가운데에서 초자아, 징벌성 처벌, 그리고 가학성을 감지했다.
다른 큰 흐름은 윤리라고 불린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승되어, 법보다는 진정한 인간 행복의 가능성의 개념에 기반한다. 여기서 행복으로 번역되는 그리스 개념인 Eudaimonia는 단지 평안, 즐거움, 또는 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의적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한다. 이는 행복한 삶이라서 중요한 것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는 삶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들이 윤리적인 삶에 대한 사유를 인간 행복의 가능성에 기반하려면, 이 주장을 받쳐줄 탄탄한 심리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그들의 주장은 단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학을 설립하고 기술하는 데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의 업적도 정신분석 수련의 일부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 방법은 한계가 있었고 어느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eudaimonia에 의거한 접근은 의도는 좋지만, 인간 삶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고 순진하다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e.g. Williams 1986; Lacan 1959-1960) 문명과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자신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설정은 전혀 없노라고 단호히 고집했다. 프로이트의 선두를 따라, 정신분석가들은 해체자(debunker)의 역할을 맡는 경향이었다. 즉 충만한 윤리적인 삶 가운데 그려지는 행복한 삶은, 인간 정신의 강력한 반사회적인 성향에 눈을 감아버린 희망사항에 불과한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사업은 아직 극복되거나, 반증되었거나, 무효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완성으로 남았을 뿐이다. 고대시대에서 이 사업은 진전할 수 있는 만큼 진전하고는, 멈췄다. 그 후로 동면상태이다. 사람에게 정신통합이란 무엇인지 상세하고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한 세기 동안 정신분석 활동을 해 오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정신 통합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 행복의 필수요소이다. 따라서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의 이해는 아직 기초단계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이제는 우리 정신분석가들이 180도 전향을 할 때이다. 우리 역할을 기존 전통의 해체자 보다는, 냉철한 지지자로 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정신분석 작업을 하며 인간 행복의 장해물을 항시 목격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해요인들을, 행복개념이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다루어야 할 실질적이고 쉽지 않은 도전으로 보자. 이렇게 정신분석은 인간 성취(human fulfillment)라는 개념에 기반한 윤리의 반대자가 아니라, 바로 이런 사업의 깨어있는 수호자가 될 수 있다. 자기애, 질투, 공격성, 파괴성, 반사회성 등 정신분석이 일깨우는 난제들은, 이 사업의 반증이 아니라, 이 사업이 정직한 추구가 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며 우리는 감성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결론에 이르기를 희망한 나머지 성급한 지름길을 넘겨짚으며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Williams 1995, pp. 202-205 참조) 이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 행복은 더불어 사는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적인 직관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신분석적 연구는 이 통찰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21세기의 열 다섯 번째 해에 진입하며, 난 우리가 할 일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사는 윤리적 삶의 개념은, 과연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다채롭고 냉철한 심리학적 기술에 기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수 천년간 이어져온 바이다. 정신분석은 이 주장을 실현하기에 특별한 위치에 있다. 진정한 마음의 통합에 대한 섬세하고 냉철한 기술은 정신분석만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척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과제는 바로 눈앞에 놓여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좋은 연설이란 일종의 초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료 여러분, 나의 이야기가 초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다시 말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활기를 불어졌기를 바란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논의는 정신분석의 근본 규칙을 정신분석의 핵심에 놓고, 이것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서 시작하였다. 12
Footnotes
Translated by: Hamin Lee 번역: 이하민 247 West 30th Street, Ste. 10-R-2 New York, NY 10001 E-mail:
1
투키디데스(Thucydides) (431-411 B.C.) 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 사건 전체를 기획하고 이 참사가 터지게끔 길을 열며, 또한 이 일에 가장 많은 생각을 투자한 장본인은 바로 당대 아테네의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인 안티폰이었다…” (The Peloponnesian War VIII:68, p490)
2
플라톤, 국가론 IX. 571c-d(C.D.C. Reeve 번역)
3
Alle tis phusis tes psuches.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I.13, 1102b13-14. 나는 “비이성적인 영혼을 통합하기” (리어, 2014a) 그리고 “질병을 통해 얻은 지혜: 정신분석적인 인간의 파악” (리어, 2014b)에서 이 부분을 더 논의한다.
4
Physics II.1, 192b0ff.
5
“이 기술[최면]을 내 환자들에게 적용하려고 한 순간, 나는 알고야 말았다. 적어도 나의 능력만큼은 심각한 한계에 당면했다는 것을. … 나는 이내 ‘당신은 잠이 듭니다. 잠이 들어요!’ 등의 명령을 내리고, 또 최면의 깊이는 대개 얕았기에 환자는 ‘하지만 선생님, 전 잠이 안 들었는데요’라고 하고, 그럼 ‘나는 일반적인 잠이 아니고, 최면상태를 말하는 거에요. 보시다시피, 당신은 최면에 걸렸고,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등, ‘어쨌거나, 당신이 잠이 들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는 식으로 감질나는 설명을 지어내기 지쳐버렸다. 정신치료를 하는 다른 의사들은 이런 어려움을 나보다 더 능숙하게 헤쳐나갈 줄 믿는다. 그렇다면 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에 착안하면 된다. 한편 내가 보기에 특정 단어의 사용으로 이런 망신스러운 상황들에 이토록 자주 당착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면, 그 단어도, 망신스러운 상황도 모두 피하려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6
잘 알려졌다시피, 어떤 정신증 상태에서 사람들은 억제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규칙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이들도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셈이다.
7
이성은 지혜롭고 영혼 전체를 위해 선견지명을 행사하는데, 그렇다면 이성은 지배하고, 활력적인 부류는 이에 복종하고 동맹을 맺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는가? (플라톤, 국가론 IV, 441e)
8
“히스테리아에 대한 분석의 단편” (1905, pp. 112-122) 훗날 도라로 불리게 된 프로이트의 사례에서 그의 추신 참조.
9
이는 또한 무의식의 정신결정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정신분석은, 어린시절 있었던 A라는 사건이 B라는 마음상태를 야기하여 훗날 불가피하게 C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할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련의 인과적 효과(efficient causes)로, 이러한 주장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가 정신분석상황에서 항상 관찰하는 것은 형식으로부터 기인하는(formal cause) 정신결정성이다. 즉,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 개인이 이를 경험하는 방식은, 예컨데, 경계해야 할 파란 불이나, 그가 질투하는 사람들은 처벌 없이 지나치는 빨간 불로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의 무의식적 정신 활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들은 의미가 부여된 특정 형식 체계로 들어오게 된다.
10
따라서 이는 칸트가 실천이성이라고 부른 것과 한 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천이성은 외부세계에 변화를 불러오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한편 이 마음의 힘은 내적 세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Engstron 2009; Rodl 2007 참조)
11
이러한 개념의 최고의 기술은 칸트의 정언명령 (Categorical imperative)에 대한 논의와 그의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의 전개로 볼 수 있다.
12
이 주제에 대해 더 심도있는 논의를 원하는 독자들은 내 책 프로이트 (리어, 2015) 2판을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