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자폐성 및 원시적 정신상태에 대한 경험은 강박성의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강박성은, 강렬한 감정 경험, 그리고 자신의 전능한 통제 밖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대상 (enigmatic object) 과의 분리사실을 당면할 때 기본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험을 대대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강박성 사고와 다변(verbosity)으로의 철퇴는 종종 생애 초기의 상실 경험과 분리성에 대한 때이른 자각과 연관이 있는데, 대상을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다. 갈등상태인 욕망에 대한 해석이나, 마음의 억압되고 전치된 부분들 및 이들을 향한 방어를 언급하는 개입은, 이 환자군에서는 유의미한 치료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나는 대안으로 이 환자들과는 원시적이고 비상징적인 (nonsymbolic) 정신기능 수준에서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는 경험이 언어로 전달되고 역동적으로 해석되기 이전에 분석상황의 지금 여기에서 우선 겪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초기 상실의 경험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강박성으로 도피하는 한 환자의 분석사례를 통해 이러한 접근을 그려보고자 한다.
Translation Text
프로이트는(1926) “강박 신경증은, 정신분석적 연구 대상으로는 그 무엇보다 흥미롭고 보람있는 주제이다. 한편, 임상적으로는 여전히 난제이다” (p. 113)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멜처 (Meltzer, 1975a, b), 터스틴 (Tustin, 1992), 그리고 알바레즈 (Alvarez, 2010) 와 같이 심인성 자폐와 원시적 정신상태를 연구하는 분석가들 덕분에 전통 정신분석은 강박성에 대한 기존의 진부한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선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자폐성 및 원시적 정신상태에 대한 경험이, 강박성의 기전과 소위 신경증적 환자군으로 분류되는 환자들 일부의 분석적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며, 이어질 내용에 이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나는 강박성 인격구조의 정신증적 및 자폐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강박 신경증(obsessive neurosis)보다는 강박성(obsessional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마음의 보다 원시적이고 정신화되지 않은(unmentalized) 부분에 개입하는 것이 그만큼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원시적인 정신기능 수준에서 경험은, 언어를 통해 전달되거나 역동적으로 해석될 수 없고 우선 분석상황의 지금 여기에서 분석가와 환자가 함께 직접 겪어야 한다. 욕망과 갈등에 대한 해석, 또는 억압되거나 전치된 인격 측면들과 이에 대한 방어를 다루는 개입, 또는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은, 이들 환자들에게 잘 닿지 않는다 (알바레즈 2010). 이미 몇몇 분석가들은 환자와 보다 원시적인 정신기능 차원에서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으나, 여기에 강박성 환자는 분석가에게 한가지 추가적 난제를 안겨주는 듯하다. 강박성 환자들은 종종 언어능력이 고도로 발달하였기에 분석가도 언어화 된 내용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될 수 있고, 자칫 총체적 전이상황(total transference situation)에서 비언어적 그리고 언어화가 불가능한 요소들이(unverbalizable elements) 간과되기 쉽다. 즉 분석가는 환자의 정신통합수준을 과대평가하여 상징성과 성찰 중심의 작업을 하도록 유혹받는 셈이다.
정신분석의 영역이 확장되고 사고와 몽상 능력(dreaming capacities)의 결여를 보이는 환자들에 대한 경험이 쌓이며, 많은 분석가들은 무의식을 억압 무의식(repressed unconscious)으로만 개념화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느낀다 (마트-블랑코 (Matte-Blanco) 1988; 롬바르디 (Lombardi) 2009; 버그스틴 (Bergstein) 2014 참조). 이는 특히 경험의 대부분이 정신화 되지 않은(unmentalized) 원시적 및 자폐성 심리상태에서 두드러진다 (미트라니 1995). 억압 무의식은 마음의 정신증적이지 않은 부분을 다룰 때 분석작업의 주 대상이 된다. 억압을 통해 무의식화 된 것은 표상화가 가능하여, 꿈이나 말실수, 증상 등을 통해 나타나므로 해석을 통해 의식화될 수 있다. 한편 억압을 거치지 않았으나 무의식에 속해있다는 것은 1 , 표상화가 되지 않은 느낌들을 의미하고 이들은 마음의 정신증적 측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표상화 되지 않은, 더 나아가 표상화가 가능하지 않은 정신 영역을 당면하게 된다.
원시적 정신 상태 (A Primitive Mental State)
도날드 멜처는 심인성 자폐를 “강박성 질환 중 가장 원시적인 질환”이라고 표현하는데 (1975b, p. 209), 그가 이 아동들과 한 작업은 강박성 방어와 강박성 사고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멜처에 의하면, 우리가 “강박”이라고 일컫는 기전의 기본은 “대상들의 격리 (separation)와 전능적 통제로… 이는 점점 복잡다단하게 진화하는 대상관계를 장악(master)해버리기 위한 수단이다” (1975b, pp.209-210). 심인성 자폐아동의 분절화와 분해(segmentation and disintegration)기제는 강박성 인격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접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와 자신의 욕동 안에 좋음과 나쁨을 분리하려는 갈라내기(splitting)와는 다른 과정이다. “자폐성 기제는 경험을 대대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시도로, 대상에 대한 복합적인 경험을 감각운동 요소들로 분산시킨다” (멜처 1975b, p.211).
강박성 기제들은 파국상황을 피하기 위해 감정경험을 통제하는 자폐성 기제의 한 형태이다. 이는 너무나 원시적인 방식으로 감정경험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의 정신영역 밖에 속한다 (멜처 1975b). 멜처는 자폐성 분절화를 해체 (dismantling)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이 현상은 강렬한 감정경험 앞에서 인격의 응결력을 유지해줄 정신적 “접착” (“adhesion”)의 부재, 그리고 압도적인 경험을 담아내고 감당해줄 마음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해체란, 가학성을 띄지 않은 수동적인 과정으로, 자기(self)가 붕괴되어 흩어지고 그 파편들이 환경의 감각적 요소들에 제각각 붙어 복합적이고 의미있는 감정경험으로 모아지지 못하는 것이다. 환자는 당장 가장 두드러지는 감각적 요소에 매달려 이것이 경험 전반을 차지해 버리고, 이는 경험의 나머지 요소들, 즉 경험이 통합될 경우 감당 못할 복합적인 경험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격리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나는 소리가, 자신 또는 대상의 전부를 이루는 경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복합적인 감정 경험에서 단일 감각 자극만을 추출하여, 정서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경험은 이렇게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단순자극으로 환원된다.
강박성인 사람의 정신분석과정에서 종종 해체의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끝없이 장황한 말들이, 마치 연막이나 모래폭풍과 같은, 상징화가 결여된 무의미한 음절의 집합체를 이룬다. 그만큼 강박성 환자의 언어와 논리는 상징적 사고를 전달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전능적 자기 유지 (omnipotent self-holding)에 이용되는 “자폐성 물체” (“autistic objects”)또는 “자폐성 형태 감각” (“autistic sensation shapes”) (터스틴, 1992)에 더 가깝다. 따라서 분석가가 환자가 하는 말의 상징적 의미를 유추해내려 하면, 사실 환자는 사고나 몽상을 하지 못하며, 오로지 소화할 수 없는 경험을 단어라는 형태로 쏟아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오그덴(Ogden,1989)은 자폐-접촉 방식의 경험 생성이(autistic-contiguous mode of generating experience) 모든 강박성 방어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본다. “이들 방어는 경험을 견고한 감각요소들의 집합체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수반하는데, 이를 항문애적 소망과 불안의 회피, 통제 및 표현을 위해 마음이 경험을 상징적, 관념적 수준으로 정리하는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방어는 환자 자신의 자기감에 체감되는 구멍을 틀어막으려는 시도로, 환자는 이러한 구멍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제 신체 내용물이 새어나올 수 있다고 (가장 일차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서) 느낀다” (p. 133).
강박현상의 이해에는 항문기적 가학성 및 가학성이 지배적인 사랑이 핵심이라고 널리 통용되어왔다. 한편, 전능적 통제 기제가 동원되는 이유는 반드시 가학적인 폭압이나 가학적 충동을 통제할 목적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멜처(1975a)는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가학성을 어떤 연장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한쪽 극단에 우리는 대상을 갈갈이 찢는 데에서 오는 극단적으로 잔인하고 과격한 쾌락을 둔다면, 다른 극단에는 자폐성 상태에서 관찰되는, 단지 대상들이 서로로부터 친밀한 접촉을 구하는 성질을 제거할 뿐 고통은 가하지 않는 비가학적인 자기의 해체(dismantling of the self)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양 극단 사이에 우리는 강박성 장애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억압된 본능적 갈등에 대한 방어라는 기존 강박성 개념에 더하여, 나는 강박성 방어는 감정경험과 대상관계의 복잡다단함을 감당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복잡다단함이란 어머니를 아름다운 동시에 불가사의한 존재인 미학적 대상으로 보는, 멜처의 이론에 잘 그려져있다. 따라서 나는 강박성은 정신분석상황에서 미학적 대상과 심적 진실을 접할때의 압도적인 충격을 모면하기 위한 방어라고 생각한다. 변화가 곧 파국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므로, 강박성은 이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셈이다.
벡(Beck, 2002)이 언급하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들로, 적정수준의 자극과, 적정수준의 생동감(aliveness)만을 감당할 수 있을뿐이다” (p. 22). 예측불허하게 다가오는 대상 및 감정경험은 마음을 깨우고 자극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스로 모든 자극을 제거하여 불변의 상태를 보존하려하는 죽음본능이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적 진실과 생동감의 정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살아있는 대상의 복잡다단함을 온전하게 파악하는데에는 한계가 있고, 특히 그 대상이 생명이라는 현상 자체일때는 더욱 그렇다. 비온(1962)은, 지나치게 힘들거나 강한 감정이 유발되면, 아기는 삶과 살아있는 대상의 인식(awareness of life and living objects)이 자아내는 심란함을 피하기 위해, 엄마의 유방을 외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도 아기는 굶주리지 않기 위해 다시 젖을 물 수밖에 없다. 즉 아기는 영양학적 모유(material milk)와, 심리적인 유방(psychical breast)을 마음속에서 분열(split)하게끔 된다. 그러면 아기는 자신에게 젖을 주는 살아있는 존재를 자각하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할 필요 없이 다시 젖을 빠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랑, 이해, 그리고 정신발달을 구하던 마음은 이제 물질적 만족추구로 편향되었다. 나는 이 현상이, 심인성 자폐아가 자폐성 물체 (autistic objects)를 강박적으로 사용하고, 또 이들 물체를 살아있는 사람보다 선호하는 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본다. 또한 이 점은 강박성 환자가 분석경험의 정서적인 측면과 물질적인 측면을 분열하여, 분석가의 미학적 영향력을 단지 어떤 기능으로 환원시키고 감정이 있는 주체이자 한 인간으로써의 분석가와의 접촉은 모조리 피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온이 말하는 정신증적인 기능이 지배하는 마음상태라는 것은, 마음이 대상의 생동감과 예측불가하고 통제불가한 (1959, 1962) 측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몽상이 부재 (incapacity to dream)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사자는 감정을 죽이고, 오로지 무생물과, 그 어떤 것도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 인과적 사유만이 허용되는 망상적 세계관에서 살게 된다. 감정이 죽으면 마치 ‘논리적이고 심지어 수학적으로 보이나 감정적으로는 전혀 유효하지 않은 관계성(links)이 정신증적 마음에서 과하게 두드러지는’ 현상을 유발한다(1959, p.109). 관계성은 생명력이 제거된다.
강박성 환자는 예측과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의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성을 맺고 있는지 곰곰이 해독해내는 데에 몰두한다. 여기서 진정한 과학적 탐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될 수도 있고, 강박적 기제들이 진실탐구 및 과학정신에 다분히 기여하는 것도 가능하나 이들 기제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전능감을 전제로 작동한다고 멜처는 말한다. 이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공상을 통해 참을 수 없는 타자성 (otherness) 그리고 인간 경험의 불가해 및 불가지한 측면과 맞닥뜨리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전지전능적 공상(omnipotent fantasy of omniscience)인 경우가 많다. 멜처는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한다. 과한 전능감은 “우리의 사랑과 사랑하는 대상들이 꽃을 피울 수 있는 통제된 온실을 지으려고 하는 것인데, 대상들은 자라기는 커녕 시들고, 물감입은 꽃잎은 지며, 실험실의 동물은 죽고, 동결절편은 바스러진다’ (1975b, p. 221). 이는 지극히 안타까운 상황으로, 좋은 대상에 대한 신뢰의 부재가 불러오는 이 비극은 우리가 자폐아동을 대할 때 특히 깊이 실감할 수 있다고 멜처는 말한다. 이 신뢰의 부재는, 취약한 자아(self)가 정신적 진실과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대상으로부터 적절히 조율받지 못하고, 대상이 이 힘든 과정을 자신과 함께 감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에서 온다고 그는 짐작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 강박성을 사뭇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이 시각은 강렬한 감정경험과 불가해한, 매혹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대상과의 조우는 기본적으로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운다. 이 대상은 우리와 분리된,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억압된 본능적 갈등의 해석이라는 기존 접근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경험으로부터 후퇴한 상태인 강박성 환자를 돕기에는 역부족이다. 강박성 환자가 감정경험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통제를 잃지 않기 위해 분리, 분절화, 그리고 회피기제를 더이상 동원하지 않도록 도우려면 우리는 이에 걸맞은 새로운 시각을 갖춰야 한다.
분리성(Separateness)의 조기인식과 자폐 상태 (Premature Awareness of Separateness and Autistic States)
자폐성 보호 기제들이 작동하게 되는 주 원인은 때이른 분리성의 자각이다. 터스틴(1992)은 아이가 홀로 감정 경험을 겪도록 방치되면, 아이는 ‘둘인 상태(twoness)’ 와 분리성(separateness)을 급작스럽게 직면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이 감당하거나 체계화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난 의식의 고통(agony of consciousness)”을 경험한다. “따라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각(awareness)을 없앨 목적의 각종 자폐성 보호 기제들이 동원된다” (p.107). 감정적 진실의 과도한 자각은 우리를 극히 취약하게 하는데, 이는 강박성 기제가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근본 원인으로 강박성에 대해 효과적으로 개입하려면 바로 환자의 이 취약함을 다루어야 한다.
강렬한 감정 경험을 감당하는 능력은 아기를 돌보는 엄마가 자신 안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능력을 아기가 내재화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아기의 강렬하고 압도적인 감정들을 견디고 수용해줄 대상이 부재하면 이는 파국적인 분리성(catastrophic separateness)으로 경험되어 (터스틴 1992; 미트라니 2001) 호기심의 발달에 심각한 제한을 일으키는데, 이는 정신증의 특징적인 병리이다 (1959, 비온). 이러한 호기심의 제한은 강박성 환자와 심인성 자폐 아동의 분석에서 분석가에게 감정적인 투자가 제한되는 경향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알바레즈 (2010)는 심인성 자폐아동과 작업을 하며, 엄마의 감정적 철폐가 만성적인 데에서 발생하는 마음상태는, 환자가 그 상태 뒤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나는 실제로 일차 대상을 영원히 잃은 경우, 아기가 엄마를 애도해야 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 엄마 없이 살아가고 발달해야 하는 상황도 추가하겠다.
멜처(1984)는 마음은 아직 알파 기능으로 처리되지 않은 감정경험에 대해 “경악한다”고 (“amazed“) 표현한다. 이는 종전에 접한 적이 없는 감정경험인만큼, 곧바로 의미를 내보이지 않는다. 나는 일차대상의 사망이나 조기상실이 바로 이러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낯설고, 가늠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여태까지 한 영혼이 한번도 접하지 못한 경험이다. “그 의미를 발견하려면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전에 이 경험을 수용할 수용자(container)가 필요하다 (멜처, 1984, p 69)”.
임상 사례: 톰 (Clinical Example: Tom)
환자가 전이관계에서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자폐성 및 강박성 격리 (encapsulation)상태로 후퇴한 경우를 예로 들겠다. 이 예에서 전이관계란 정신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던 매우 어린 시절 중요한 대상의 상실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경험을 억압 이외의(unrepressed) 무의식적 방법으로 대응한 과거에 대한 메아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톰이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상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접근을 했을 때, 톰은 내게 오해받는다고 느끼고 우리가 분리되어있는 두 사람(separateness)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다시 겪어 더욱 곤고한 강박성 기제로 숨어들곤 하였다.
나는 강박사고, 강박 언어, 그리고 자기와 대상의 감정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을 갈라놓는 것(splitting)이 어떻게 전이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서접촉과 미적 영향력을 완충 및 대처하기 위해 동원되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어질 내용은 분석이 어느정도 진행되어 위에서 말한 경험들(정서접촉, 미학적 영향력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더 온전하고 열린 마음으로 탐색할 수 있게 된 시점에게 발췌하였다.
톰은 2 직업을 잃은 후 찾아온 공허함과 허무함에 나이 마흔살에 치료를 찾았다. 그의 초기 발달력에 대해서는, 그가 두살때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인 아버지가 키우기에는 너무나 어려서 먼 동네에 사는 미혼 이모네 집으로 보내졌다는 점만 언급하려고 한다.
톰은 몇년간 분석중이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분석에 매우 몰입하였다. 거의 회기에 빠지지 않고, 분석이 그에게 삶을 불어넣어주는 경험이 된 듯하였다. 그는 가족들과 심도있는 관계를 맺고, 주변 대인관계도 넓혔으며, 인생에 더 깊은 의미를 맛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박적이고 수고로운 말투가 주 4회 만나는 우리의 매 순간을 가득 채워, 분석상황에서 체감되는 분위기는 종종 지치고, 무기력하고, 좌절스럽다.
나는 환자의 강박적, 순환적, 그리고 반복적인 사고 및 언어방식에 초점을 맞춰, 강박적 사고, 강박적 기능의 중심에 있는 전능감이 어떻게 환자를 생존하게 하는지 강조하려고 한다. 이러한 전능적 기제는 자신이 붕괴되어 허공으로 새어나가 흩어져, 영원히 찾아지지도 품어지지도 못하게 될것이라는 극단적인 두려움에 대항하기 위한 원시적인 자기유지 (primitive self-holding)기능을 수행한다 (시밍턴 Symington 1985). 강박적 사고와 자기비난에 더해 톰은 여러 강박행동과 강박의식 절차(rituals)를 한다. 이중 일부는 분석 시간 중에 시행되는데, 예를 들자면 분석가 사무실에 항상 같은 쪽 발로 들어온다던지, 카우치에서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 방을 떠나기 전에 정면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 등이 있다.
톰은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이론들을 설명하고 겹겹이 발전해나간다. 그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노라면 마치 정교하게 계획된 제어판으로 조작되는 잘 기름칠 된 유압장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다. 톰은 말하기를 무척 즐기고 자신이 사용한 단어들 자체에서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쾌락을 얻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비온의 베타 스크린 (1962)를 연상시킨다. 그의 말은 응집력이 없어 나에게 통합된 감정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혼란, 짜증 또는 지루함만을 유발하였다 3 . 이는 결과적으로 인격의 정신증적인 부분의 기능인데, 치비타레세(Civitarese 2015)가 언급했듯이 “정신적 긴장-즉, 베타 요소(beta elements)들을 소화시키기보다, [인격의 정신증적인 부분을 보이는 환자들은] 토하듯 내보낸다. 이러한 환자들은 단어를 상징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가상의 전능적 독립성을 구축한다… 그들은 온갖 경쟁심, 질투, 욕심, 위협, 사랑과 증오로부터 격리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세운다” (p. 1097).
톰은 같은 내용을 비슷한 형식으로 몇번이고 반복하는 습관이 있는데, 나는 “그래! 알았다고! 이제 그만!”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끼곤 한다.
그는 보통 삼십분 정도 말을 하다 멈추고 내가 반응하기를 기다린다. 내가 말없이 있거나, 또는 말폭탄에서 회복을 힘들어하고있으면 그는 상처받고 위축되어 부루퉁해하거나, 어쩔때는 분노에 가득찬 채 조용히 있는다. 또는 잠들어버리기도 한다. 몇년간 톰은 나로부터 필요한 것도 바라는 것도 없어보이는 순순한 환자였다.
톰은 지난 회기에 자신이 언급했던 것에 대해, 나는 사실 기억이 전혀 안나는데 마치 우리 둘 다 알고있다는듯이 이야기할 때가 많다. 우리가 분리되어있다는 것과 시간의 흐름 및 이 연장선에 놓인 유한함과 죽음을 전제하지 않는듯하다. 이는 아마도 우리는 하나라는 착각을 일으키기 위한 시도일것으로 추정되나, 사실상 톰으로부터 나의 괴리감만 증폭하는 효과만 불러일으킨다.
톰은 분석을 시작하고 오년이 지나고서야 어머니의 사망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눈물을 보였으며, 이년이 더 지나서야 처음으로 어머니의 묘를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사망은 항상 그에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나, 톰은 이 초기 상실과 감정적으로 거의 닿아있지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전이관계에서 증가하는 감정적 접촉과, 이를 통해 어머니의 상실과도 접촉이 증가하여 그에게 그리움의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로소 톰은 어머니를 애도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러한 변화는 전이상황에서 나에 대한 호기심의 증가한것과 나에 대한 요구가 증가된 것에서 드러난다.
약 이년 전 톰은 치료자인 나의 어머니가 사망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인근 신문에 실린 내 어머니의 부고를 보게 되었고 나도 그 다음주 회기들을 취소해야한다고 설명하며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렸다. 나는 이 죽음과의 조우가 그를 산산조각내고 톰이 우리 사이에 둔 견고한 경계가 부서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막상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부분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분명 나도 그 당시 취약한 상태였을 것이고, 한편 우리 상황이 같지는 않아도, 나는 톰과 더 친밀하게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톰이 아마도 이를 무의식적으로라도 감지하여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분석을 재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톰의 말이 더욱 강박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 듯하지만 말하기엔 다소 어리석은 것 같은데, 한편 어리석은 말을 하고 싶은 마음과 갈등이 있기도 하면서 혹자는 말하는게 어리석더라도 여전히 내가 하고싶은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수도 있지요. 문제는 어느 편이 더 우세할 것인가인데. 결과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하는 입장은,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는것인데, 그 말들을 안하기가 굉장히 어렵단말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말하는 많은 것들은 내가 생각해서 자명하다고 결론내린 것들을 반영하는 생각들인데, 현실은 훨씬 강력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뭔가 마술적인 측면이 있는 자명한 이치들을 따르는것이 더 쉬울것같고, 어딘가 보다 따르기 쉬운 메타-법칙이 있는것 같아서…”
이런식으로 톰은 계속, 계속 말을 이어간다.
내 어머니의 사망으로 내가 치료를 취소한 뒤로 몇달이 지난 무렵, 나는 일주일 휴가를 갔다. 다음은 내가 복귀한 뒤의 회기 내용이고 내 기억속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최대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보려고 한다. 강박적인 내용으로 독자 역시 피로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나는 최대한 톰과 분석상황에서 함께 있는 경험을 전달해보려고 한다.
약 십분간의 침묵 뒤에 내가 한 말에 대해, 톰은 “나는 기포 안에 있어요. 이 기포에서 나오는건 만만치 않아요, 특히 다 잘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는 말이에요.”
나는 “당신은 기포속에 스스로를 가둬서 통제감을 획득하였고 이를 잃게 될까 두렵네요”라고 한다.
그는 “두렵지 않아요. 그로부터 나와야 할 이유를 성공적으로 생성해내는 것이 없어요.” (그의 목소리가 매우 높은 톤으로 쉰소리가 나, 나는 톰이 매우 긴장했음을 알 수 있다.)
톰: 여기서 나와야 할지 아닐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에요. 비판하고, 분석하고, 이해해서 거기서 성공적으로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왜 그래야할까요? 이 상태를 받아들이는게 뭐가 어때서요? 시도야 해볼 수 있겠지만 그건 매우 인위적인 시도에요. 지극히 인위적인 이 상태로 들어가서 이 감정을 잊을수 있지만, 이것 역시 인위적일 거에요. 개념적으로 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외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 별로 좋아보이지 않으니, 내 본능이 이를 거부해요.”
톰은 쏟아내듯 이어간다. “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내가 무언가에 대해 방어하는 것 같군요. 무엇을 보지 않길 원하는거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뒷다리로 일어서서 밀어내려는 것은 아니고– 이 작은 장애물을 뛰어넘을지 아니면 말지 선택해야하고, 뭐하러 뛰어넘어야하지? 하고 나는 생각해요. 무엇이 쌓여있는 것인지 난 알지 못해요. 그래서 결국 나는 뛰어넘지 말아야한다고 느껴요. 이 갈등은 항상 존재해요– ‘해야할지 말지, 해야할지 말지.’ 너무나 익숙한 상태이다보니 내가 불협화음을 느끼지 않도록 필요한 조화로운 느낌을 생성하게끔 자동적으로 행동하게 되어서 사실 더이상 나에겐 딜레마가 아니에요.”
치료자인 나는 지쳐버린다. 이 모든것이 어디로 가고 있나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는 조용히 있다가, 그가 다시 말한다: “있잖아요, 지난주에 당신이 어디간건지 난 묻지 않아요, 만일 이 질문이 나를 귀찮게 한다면 아주 약간만 그래요.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에요. 당신에게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답을 모르고도 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다 알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나는 보통 호기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려요, 그러면 모르고도 살 수 있다고 할때 이건 뭘까요? 가식? 사생활 존중? 당연히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나는 지금 통제를 아주 잘 하고 있는 상태라 달리 행동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외부의 시각에서 본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이겠지요, 뭔가 빠진 부분, 회피, 그러나 왜 그런지 이는 무한대이고 이 무한대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통제감을 얻기란 어려워요. 이 무한대로 흘러나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고, 통제의 반대에요.”
그는 이런식으로 계속 이어나가고 나는 마비된 느낌이 든다.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강박적인 말들은 분명 매우 폭력적이다. 내 마음을 마비시키고 침묵하게 한다. 어쩌면 이에 더해, 톰은 자신이 종종 처했던, 단어들로 이루어진 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험을 내게 가하여, 자신의 경험을 (내가 직접 경험하게 하는) 원시적인 소통방식으로 내게 전달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강박적인 소통에 내재된 폭력성의 일차적 목적은 내 말에 갑자기 톰이 놀라게 되는 가능성을 통제하기 위함인듯하다. 말을 못하게 하면 내 말에 놀랄 일도 없으니; 그는 나의 타자성(otherness)을 조우할 일도 없고 자신을 지나치게 동요시키거나 내면에 파국적인 변화를 일으킬 위험을 맞닥뜨릴 일이 없는 것이다.
그 회기 후반에 그는 직장에서 자신을 굉장히 화나게 만들었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미친놈인지 동맥을 뜯어버리고 싶다니까!” 그는 이내 설명을 한다: “충동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상대적이지요.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상대적인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기준을 따라야할까요?”
어쩌면 동맥을 뜯어버리고픈 대상이 나일수도 있다고 깨닫고 나는 급하게 개입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동맥을 뜯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통제할 필요를 느끼는군요.”
톰: “그래요, 하지만 나는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아요. 결과적으로 내 관점은 주관적이고 무관해요.”
그는 강박적으로 말을 이어가다가 드디어 멈춘다. 우리 둘 다 탈진상태로 기진맥진하다.
톰은 그의 째지는 목소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날 지극히 불안한 듯하다. 그는 자신의 불안에 감정적으로 접할 수 없고, 압도당한 채, 정신화되지 않고(unmentalized) 자신의 안에 있는 고함을 치는 듯한 폭풍을 배출해내야 한다. 한편 누군가의 동맥을 뜯어내버리고 싶은 그의 소망에 대해 개입함으로 나는 그의 이차적인, 방어차원의 본능적 소망을 언급하고, 감당하지 못할 호기심과 정신화되지 않은 감정에 압도당할까 두려운 그의 일차적 불안을 다루지는 못한듯 하다. 여기서 나는 비온이 자신의 환자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 떠오르는데 (1959), 분석의 맥락과 별개로 바라본다면 일차적 공격성의 발현으로 보일 수 있는 환자의 행동을, 비온은 이 폭력성은 환자입장에서 느낀 분석가의 방어적인 부분에 대한 반응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톰의 강박성향으로 후퇴한 모습 역시, 내가 자신의 소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느낀데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낄 때, 그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구름으로 스스로를 품으려는 시도를 한다. 4 회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나는 내 귀를 말 그대로 긁어대는, 그의 째지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나는 겨우 이야기를 해내지만 다소 엉성하게 말한다. “어쩌면 당신은 고통스러운, 째지는듯한 불협화음 상태를 느끼고 어쩌면 그걸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네요.”
톰: “문제는 이 불협화음이 나한테서 기인하는지, 아니면 내재적인 것이라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답보상태에요.”
치료자: “이 불협화음의 정체는 뭔가요?”
톰: “허공에, 나를 위한 어느 정확한 지점, 내가 필요한 모든것을 반영할 수 있는 어떤 곳에 내 자신을 위치시킬 수만 있다면 될텐데, 이 생각을 계속 하게 되어요. 이론적인,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지점이지요. 나는 나의 조화로운 지점을 찾고있는것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 소망을 불협화음이라고 부르지요. 그런 곳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치료자: “어떤 소망과 호기심이 있다는것 자체가, 불협화음이라고 하는 것 같네요. 어떤 일정한 불변하는 소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온갓 소망과 욕망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이 일정한 소리에 균열을 일으켜요.“
톰: “되도록 그런곳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나를 위한 새로운 목소리를 개발했어요- 설명하는 목소리지요, 그러나 이 목소리는 메말랐어요. 결국 나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살고 있어요. 그 누구도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 곳이지요. 나는 책임감있는 성인이 되어야하는데에 지쳤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잇는다: “나는 D[한 친구]와 분쟁중이에요. 지난 화요일 그와 통화하다가 갑자기– 탁! 조용해서보니 나 혼자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어요. 다시 시도했으나 같은 결과였어요. 그래서 그의 집전화로 해봤지만, 받지 않았어요. 휴대폰으로 또 전화했어요– 그러나 다시 음성사서함이었어요. 그제서야 나는 그가 나를 차단하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어요. ‘좋아! 그럼 너가 나한테 전화해!’라고 외쳤어요. 보통 내가 전화하는 쪽이에요. 오늘이 칠일째인데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나는 성숙한 성인처럼 다시 그 친구에게 전화해볼 수 있긴 해요. 내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왜 다시 전화하지 않았냐고 물어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가 완전히 솔직하게 대답하진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게 가능해지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기운이 없어요.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겠지요.”
지난 칠일간 (그리고 오늘 회기에서) 그에게서 연락을 끊어버린 친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하며, 얼마나 내가 그립고, 나와 재접속할 길을 찾지 못해 헤맸는지, 그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솔하게 드러내는 데에 나는 마음이 동했다. 또한 톰이 자신이 내게 버거운 존재여서 그를 견딜 수 없어 내가 휴가를 얻어 그를 떠났다고 여긴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치료자: “내가 일주일간 사라졌고 당신은 당신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는 당황한 눈치다. 그는 자신이 우리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재정비를 하고 “이봐요, 나는 아무 이야기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곤 하다가도…”라고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었어요. 하던 생각을 잃었어요.”
나는 “어쩌면 내 이야기를 설명으로 밀어내고 시도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당신을 뒤흔들어놓은것 같아요.”
그는 회기가 끝날때까지 일, 이분간 침묵한다.
다음날, 톰은 시작부터 대뜸 내가 세무조사를 받은 적 있는지 물어본다. 나는 상당히 드문 일인, 그의 이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한다. 나는 전날 예기치 못한 통제 상실에 그가 충격을 받고, 이제 내 마음과 몸을 침습하여 다시 통제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끔찍한 경험에 대항할, 능동성의 표현일 수 있겠다. 그는 나로부터 당했다고 느낀 침투감을 내게 가하는듯하고– 이는 아마도 그의 내면에 깊이 각인되어있는 경험일 것이다.
그는 내가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은것에 상처받고 내가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얼마나 조심해야하는지를 반증한다고 말한다. 그는 더 설명하다가 침묵속으로 후퇴한채 말하기를 거부한다.
갑자기 그는 이마를 탁 치더니 전날 꾼 꿈이 기억난다고 한다. 그는 “흥미로워요,”라고 한다, “여기 오기 전에 지난밤 꿈을 꿨나 생각해봤는데 꾸지 않았다고 결론지었었거든요.”
그는 나에 대한 꿈을 꿨다고 한다. 꿈속에서 톰은 나와 내 부모를 식당에서 만났다. 나는 파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려하고, 아무런 연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것처럼, 자신도 이제 대답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생각해본다.
톰: “내가 반응하게 되는 뉘앙스는 언제 선생님이 분석가로써 전문적인 태도로 대답하는지, 또는 언제 선생님의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해 전문적인 판단을 방해하는지에요. 나는 이 둘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거라는 공상을 하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약간은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선생님의 개인적인 감정이 스며들어왔다고 깨달을때면,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요소가 개입했다고 느끼고 접촉을 끊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헤어나올 수 없는 폭풍속으로 삼켜질 것같아요. 나는 위험지대로부터 정확히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지 계산하느라 바빠요. 보통은 보호막을 구축해놓고 이를 감안하는데, 세무조사 이야기를 했을 때는 의도치않게, 또는 너무 흥분하다보니, 위험지대에 진입했어요. 그래서 나는 멈추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톰이 전날 예기치 못하게 허를 찔리면서 나와의 감정적 관계라는 위험지대에 진입했다고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내 감정이 중화될 가능성과 우리 사이의 감정의 정당성에 대한 강박적인 연설로 진입한다. 나는 내가 감정을 담아 반응하거나, 나의 모친이 사망했을 당시처럼, 나를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맞닥뜨릴 때 내가 톰에게 예측불허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고 언급한다. 그럴때면 톰은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폭풍속에 삼켜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강박성 또는 자폐성 기제로의 철퇴는 종종 사랑하는 대상과의 조우에서 감정적 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있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톰의 시도들은 우리의 분석과정 내내 어느정도 있어왔다. 그의 “해독”시도는 주로 나를 분노하게 하거나 내가 그를 버리지 않게하기 위해 따라야 한다고 여기는 “규칙”들과 관련이 있다. 한편, 그와 동시에 그는 나에 대한 그 어떤 욕망이나 호기심이 싹트는 것을 없애려고 상당한 노력을 들인다.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톰으로 하여금 부족함(lack)과 이에 더해 추후 발견하게 될지 모를 끔찍한 것들과의 접촉을 의미한다.
나와 내 부모에 대한 그의 꿈을 내가 몇 번 언급한 뒤, 이어지는 한 회기를 톰은 길고 무거운 침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내가 하고싶은 말을 당신에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말하기로 했어요. 나는 당신을 한번도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검색해보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여러가지를 알게되었고 그냥 거기에서 멈췄어요. 이 모든 것들로 나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당신에게 말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이게 선생님을 화나게 할 수 있고, 또 그럴만 해요. 그래서 그냥 말안하고 있었어요. 이런 일들은 일이 점점 커지고 확대되기 전에 일어나는 즉시 이야기하는게 최선이라는걸 알겠어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데, 나는 용기가 없어요.”
이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는 점에서 느껴지는 그의 신뢰에 나는 마음이 동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기심이 느껴진다는것이 무서웠고, 또 그로인해 알게 된 내용들에 홀로 압도되게 되었어요.”
나도 호기심이 들어 톰이 무엇을 검색했고 또 무엇을 찾아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답한다.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척 궁금하고 당신을 해석하고 싶어요. 동시에, 알아보려는 시도를 피하기도 해요. 난 당신에 대한 호기심은 포기해버렸어요. 어쩌면 그냥 충족되지 않은 채로 두는편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른채 혼자 있는게 나아요. 그러나 당신의 어머니가 사망했을때 내가 몰랐으면 했던 당신의 면모들과 맞닥뜨리게 되었어요. 그렇게 갑자기 뒷문으로 내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당신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나는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호기심을 잘 가둬두지만 이번에는 갑자기 튀어나와 도로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호기심은 압도적이고 위협적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호기심과 욕망을 없애버리려고 애를 쓰고요.”
그는 “내가 왜 이럴까요? 난 호기심도 있고 또 욕망도 있어요. 그런데도 이를 상자에 가두어서 통제하려고 애를 써요. 무언가 득이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하는데, 그 득이 뭔지 모르겠어요. 이 강력한 힘들에 멋대로 날아다닐 자유를 준다는 생각을 하면 어딘가 굉장히 무서워요. 내가 헤어나오지 못할 무언가에 나를 연루시킬 것 같거든요. 너무 위험해요.” 라고 한다.
“궁금해하는건 당신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군요,”라고 나는 말한다.
“그 궁금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물들을 감당하는것이 위험해요. 내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불러 일으킬 화 말이에요,” 그가 대답한다.
그가 의존하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거란 그의 두려움은 우리가 오랫동안 작업해온 부분이다. 이는 톰이 자신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그가 이성적으로 논할 수 있는 주제이다. 나는 그가 접하고 있는 위험이 지금은 다를 수 있다고 직감한다. “어쩌면 두려워하는게 화 뿐이 아닐 수 있겠어요,” 라고 나는 이야기해본다, “그 궁금증이 채워지지 않을 때 느끼게 되는 아픔도 두렵겠어요.”
톰은 친구들과 같이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던 중, 한 친구에게 그의 사업에 대해 각종 질문을 묻기시작했던 상황을 떠올린다. 어느시점에서 그 친구는 말을 멈추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뭐지 이 질문들은?”
톰은 이때가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했다가 급작스럽게 얻어맞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남들이 뭘 느끼는지 항상 이해를 하지는 못해요,”라고 그가 말한다, “그래서 나는 틀 안에 머무르고 선을 넘으면 안되요. 선을 넘으면- 크게 한방 맞잖아요!”
나는 “내 대답을 듣지 못했을때 대답을 당신은 혼자 남겨지고 이또한 한방 맞은걸로 느끼구요,”라고 한다.
그는 침묵한다.
나는 “내 답변이 당신의 욕망의 간극을 이어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라고 이어간다.
톰이 조금 더 침묵하다가 말한다. “욕망의 간극은 과연 어떻게 이을 수 있는 것일까요? 삶의 현실가운데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이 욕망을 지니고 살 수 있지요? 결국 엄마는 죽고 없잖아요.”
우리 둘 중 누구도 지금 여기 분석현장에서의 잃어버린, 불가사의한 어머니(lost enigmatic mother)와의 갑작스러운 조우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운다.
몇분 뒤 그가 말한다. “이건 매우 이상한 상황이에요. 어떤 이미지가 있는데요. 나는 만화속에서 살고 있는데 허공에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을 펼칠 수 있다고 그 만화속의 나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 길들은 모두 허공에 떠있고 나는 사실 한걸음도 움직이질 않았던거죠; 그 길들은 어디도 가지 않는 길들인거예요. 내가 경험해온 파열(rupture)을 해결하기위해 상상속에 나는 이런 길들을 무수히 만들었어요. 아마도 난 이미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거에요. 그럼에도 나는 이 모두를 부정했고, 나는 그 모든 부정의 결과물이에요.”
우리는 회기가 끝날때까지 몇분간 조용히 있다.
다시 프로이트 (Back to Freud)
내가 여기에서 제시한 생각들 상당수는 프로이트의 강박신경증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4년도에 프로이트는 이미 “자아방어와 심리적 갈등” (The Neuro-Psychoses of Defense)에서 강박성향의 환자가 버거운 생각을 피하기 위해 생각을 연관된 감정으로부터 격리해내려 한다고 관찰한다. 그는 자신이 분석한 모든 사례에서 괴로운 감정의 원인은 환자의 성생활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이론적으로는 다른 원인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덧붙힌다. 임상 경험에 비추어볼 때, 나는 자폐성 및 강박성이 발생하는 데에 개별성의 조기 인식 (precocious awareness of separateness)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특히 사랑하는 대상의 실제 사망이라는 “끔찍한” (“dread-ful”) 경험이 가장 극단적인 예가 되겠다.
페렌치(Ferenczi)에게 쓴 편지에 프로이트는(1912) 생애 초기에 죽음을 접하는 경우의 의미에 대해 기술하며, 자신의 경우 한 살 조금 넘은 시점에 형이 죽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형 줄리우스가 사망할 당시 프로이트는 거의 두살이었다). 프로이트는 개별성의 조기 자각은 종종 조숙한 자아발달을 일으키므로 강박성향을 조장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1913).
죽음을 접한다는 것은, 현실이 우리의 전능한 통제 하에 있지 않으며 죽음의 사실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점을 직면하는 상황이다. 프로이트는 부친의 사망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죽음은 “남자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가장 애틋한 상실”이라고 말한다 (1900, p. xxvi). 흥미롭게도 래트맨 (Rat Man)이 프로이트에게 건넨 말들을 살펴보면 상당 수가 상실과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크립웰 (Cripwell) 2011). 프로이트는 죽음을 애도하지 못한다는 점이 이 환자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고 래트맨의 강박신경증을 다음과같이 표현한다(1909): “나는 그의 신경증의 핵심은 아버지의 사망을 부정하려는 데에 있다고 래트맨에게 지적하였다” (p. 300). 실제 죽음과의 조우는, 특히 이 사건을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아기에 일어나는 경우 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경험이다. 나는 모친사망의 감정적 충격과 애도의 부재가 톰의 인격의 뿌리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사망이라는 사건 자체가 트라우마인 한편,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톰의 모친사망은 둘임 (twoness)에 대한 조기 인식과 과잉의 경험(experience of excess)에 걸처있는 경계성 사례라는 점이다.
상호보완적인 맥락으로, 라캉(1959)은 강박기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최초의 이해는 “경험의 근간을 이루는 쾌락경험은 대상관계를 통해 그 형태가 정립되는데, 이때 이 대상은 말 그대로 과도한 쾌락을 제공하는 대상이다”라고 한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p. 64; 이탤릭체는 추후 추가). 이렇듯이, 강박성 환자는 과잉상태를 면하기 위해 경험을 조율하는것으로 보인다.
참을 수 없는 과잉과 심미적 갈등으로부터의 도피 (Unbearable Excess and the Flight from the Aesthetic Conflict)
톰은 심미적 갈등으로부터 숨으려는 듯하다 (멜처 1988). 멜처가 말하는 심미적 갈등이란, 엄마의 외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이해불가하게 변하곤 하는 그녀의 기분, 음조, 또는 표정 등 내면의 불가사의함이 아기에a게 불안과 불확실성을 자극하면서 일어나는 간극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는 엄마와 아기의 만남은 아름다움과 고통으로 충만한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엄마의 “외면의 아름다움은… [아기에게] 격정적인 감정을 쉴 새없이 유발한다 … 한편 그렇게 지각되는 것들의 의미,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방과 눈빛, 지표면 위로 구름 그림자가 휙휙 지나가듯 엄마의 얼굴을 스쳐가는 표정들의 의미는 아기에게 불가사의하다” (p. 22; 이탤릭체는 추후 추가). 엄마 얼굴은 멜처가 소위 말하는 지아콘다(Giaconda) 미소를 띄고 있으나, 아기는 그녀가 속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이 그녀를 오고 가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맥락으로, 아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황홀하고 지고한 일체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모호하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자신의 전능한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며 이에 따르는 심적 고통에 압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소위 분석적으로 치료하고자 하는 정신병리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심미적 갈등에 의한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에 있다” (p. 29). 한편 나는 이 경험은 억압되지 않은 무의식 (unrepressed unconscious)에 격리되어 있으므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이상황의 지금 여기에서 겪어질(lived)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분석가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는 분석상황 역시 환자가 심미적 갈등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인데, 이때 환자는 “자신이… 언어도, 일반적인 비언어적 제스처도 모르는 낯선 나라에 들어왔다고” (p. 22) 느낄 수 있다. 환자는 분리성(separateness)과, 금방이라도 거절당할 것만같은 원초적 공포를 당면하게 된다. 여기에 환자는 심미적 갈등으로부터 물러나 자폐적이고 원시적인 고립(encapsulation)으로 숨거나, 또는 침습적 동일시 (intrusive idenfication)를 택할 수 있다 (버그스틴 2011). 톰은 나의 분리성 및 불가해성 (separateness and unknowability)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은 투명성이 전혀 없어서 미치겠어요! 당신이 왜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했는지 모르니 환장하겠어요! 당신의 생각들을 왜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지요? 코카콜라의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거냐고요!”
인간관계에 기본적으로 내재한 불확실성과 복잡다단함을 감당 못하는 톰은, 이럴 때면 언어적 자기 유지 (verbal self-holding)와 강박성 격리 (obssessional encapsulation)로 철퇴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종종 부재한 엄마의 목소리와 (신체적, 심리적) 손길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 자신의 목소리와 강박적인 생각은 이렇게 엄마를 대신하는 이차 피부(second skin)기능을 한다. 이러한 전능적 자기애적 철퇴(omnipotent narcissistic retreat)는 자신의 리비도 갈망을 (libidinal longings) 자극할 수 있는 대상을 혹여 만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한다. “대상관계를 향한 자연스러운 흐름은 포기한채… 삶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두려움 가득히 삶을 온전히 피하고 싶은 영아기적 갈망, 무존재라는 의미의 죽음이 아닌, 망각(oblivion)이라는 눈뜬 죽음이 차지하고… 한편 환자는 이 상황을 은연중에 일어나는 심리적 죽음으로 느낄 수 있다” (건트립 (Guntrip) 1968, p.92). 톰은 이 현상을 우리 회기 중 다음과같이 일축하기도 했다. “삶은 혼돈이다. 오직 죽음만이 질서를 가져온다!”
자폐성 및 원시적 기제에 맞닥뜨렸을 때 종종 그렇듯이, 분석가 역시 생기를 잃어 자신이 쓸모 없고 불필요하며 심지어 멍하다고 느낄 수 있다. 나는 톰과 있을 때, 나 역시 위축되고 무심해졌다. 우리는 불통, 철퇴, 그리고 강박성 (impermeablity, withdrawal, and obsessionality)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이 상황은 아마도 톰을 더 불안하게 하여 그는 이 끔찍한 기분을 어떻게든 떨쳐야만 하는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자신의 원시적인 소통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아기는 접촉을 재개하고 거절을 부정하기 위해 공상속에서 몰래 엄마 안으로 침습적 동일시(intrusive identification)를 통해 침투해야 한다고 여긴다(Fano-Cassese 2002). 브리턴 (Britton 1992)은 “자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환자는 분석가 안으로 감정을 투사하고 주입시키려는 노력을 더욱 강행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아무래도 이런 환자의 압박에 분석가 역시 내적으로 ‘굳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니 종종 악순환이 발생한다. 단어선택이나, 목소리 톤 등을 통해 분석가의 반응은 환자에게 전달되고, 이에 환자는 더 억지로 침투하려 하게 되는 것이다” (pp. 108-109).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던 톰은 나의 심적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 내 마음에 강제로 들어오려고 할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추가 임상 토의 Further Discussion of Clinical Material
비온(1967a)은, 환자가 해석을 들을 때,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분석가도 감정적 고비를 겪었다고 느껴야만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분석가는 환자가 느끼는 분리성에 대한 두려움과 과잉 감정상태에 대한 공포를 피하지 않는 동시에, 보다 신경증적, 상징적, 언어적 수준에서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을 견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환자가 아직 자신의 마음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해리해버린 부분을 분석가가 당분간 감당해주어야 한다. 톰의 경우 내가 감당해야했던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에 감정은 가려지고 숨어버리며, 홀로 이 상황을 감당하도록 내버려진 아기의 절망과 무력감이었다.
행동화와 역전이는 일어난 후에 비로소 성찰이 가능한데, 이렇게 직접 겪은 경험을 기반으로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적 내적세계와 접할 수 있다. 나는 톰을 분석하는 동안 느꼈던 좌절, 답답함, 분노, 무력감을 떠올리며 톰의 인생 초기 경험들을 상상하고(Bion 1977, p.41) 혹은 재구성해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들은 오로지 나와 분석상황에서의 재현을 통해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비로소 나는 죽어가고 소원해지는 엄마를 두고 아기인 톰이 느꼈을 절망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강박적이고 순환적인 말들을 관조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의 무의미하고 강박적인 생각들에 둘러싸였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 “왜 엄마는 나를 떠났나요?” 또는 “아빠는 어째서 나를 원하지 않나요?” 와 같은 중대한 질문들에 대한 애매모호한 답변들에 톰이 느꼈을 마음이 내게 전달된 것일 수도 있다고 이해했다. 결국 톰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끝없이 꼬리를 물고 맴도는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추상적이고 동떨어진 말들이,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생각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졌는데, 한편 소화될 수 없는 초기 경험의 원시적인 소통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가 부재한 경험을 함께 직면해줄 실제 대상이 존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홀로 남겨져,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밝혀내려고 끝없는 순환사고에 갇혀, 의미생성보다는 배설의 성격이 강한 설명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전이관계에서도 톰은, 가늠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히 실제하는 감정경험을 앞두고 망연자실한 아이가 되어, 오직 주변 환경에 최대한 거슬리지 않는 방향으로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톰은 자신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환경으로 나를 경험한 듯하다. 때에 따라, 흐리멍덩한 대상을 두고 막막함, 분노, 절박함에 가득 차 멍하고 생각이 마비된 아이 역할을 내가 맡게 되기도 하였다.
톰이 처음 죽음을 접한 것은, 마음이 그 의미나 충격, 고통, 무력감, 감정적 파장을 아직 감당하지 못할 시기였다. 이 경우,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에 의해 아이의 마음이 조각나거나, 아니면 아이가 감정에서 생명력을 쥐어짜버린다” (비온, 1967b, p.47). “강박성 증상 및 방어기제는 아기가 생애 초기부터 자신의 감각경험을 체계화하고 경계짓고자 하는 과정에서 기원한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러한 영아의 체계화 및 구획화 작업은 원시적이고 감각위주인 자기감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피하는데에 동원된다” (오그덴 1989, p.133).
톰은 극심한 감정경험의 충격을 완충해줄 대상 없이 홀로 남겨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없애고, 주로 심적 외피(psychic envelope)와 감각적 자기유지 (sensory self-holding) 목적으로 단어들과 설명들 가운데에 도피처를 찾았다.
마우스-한케(Mauss-Hanke 2013)는 이 상황을 파국적 경험이 내적 초토화(terra cremata, “scorched earth”)를 일으키는 과정으로 인상깊게 기술하였다. 당사자는 압도적이고 끔찍한 경험으로 손상된 모든 감성을 제거할 목적으로, 감정과 감정에 담겨있는 진실을 일괄적으로 삭제하는 것이다. 한편, 마우스-한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 어떤 ‘내적 초토화’도 그 토지 자체를 삭제할 수는 없다. [원하던 원치 않던] 무엇인가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자신 안에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 자라고 있다는 두려움 가운데 마음은 역설적인 상황을 맞는다: 마음은 아무런 활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한편, 그 어떤 활동도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p. 488). 이 상태가 바로 우리가 완강하게 감정경험에 저항하는 강박성 환자를 볼 때 그가 처한 상황이다. 한편, 분석가가 이 원초적 두려움을 대면하고, 이 내적 고사상태에 오롯이 잠식당하는 과정만이 역설적으로 내적 초토(terra cremata)의 재생을 돕고, 미개척상태라 두려울 수 있는 (potentially “dread-ful” land), 미지의 영역 (terra incognita)에 감히 진입할 힘을 키워줄 있다.
나는 여기에 제시한 임상사례에서, 톰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가 되어준 순간을 후향적으로 그려보았다. 톰은 나와 함께 지내며, 또 나로 하여금 이 절망, 무감각, 그리고 좌절을 겪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내적 초토와, 억압되지 않은 무의식 (unrepressed unconscious)에 고립된 경험을 내게 전달할 수 있었다.
분리성(separateness)의 자각은 우리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첫 단계이다. 원초적 자폐성 및 강박성 기제들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과의 조기 직면을 조절하기 위해 동원된다. 분리성을 자각에는 우리의 몸의 존재와, 이에 수반되는 노화 및 죽음에 대한 인식도 따르게 된다. 프로이트가 언급했듯이 (1916), 그래서 마음은 애도를 거부하고자 한다. 한편 과도한 강박성은 안타깝게도 심적 고사상태와 쫓기고 우울한 삶을 빚어낼 뿐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애도가 온전히 이루어져 잃은 것을 놓아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리비도는 상실한 대상들의 자리에 어쩌면 더 소중한 대상들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Footnotes
1
여기에 나는 트라우마 상황과 같이 마음에서 상세히 인식이 안되는 자기의 해리된 부분과, 자아가 미성숙하여 경험을 한데 모아 아우르고 통합하지 못하는 감정경험도 포함시킨다 (위니캇 Winnicott 1974 참조).
2
이 환자의 분석의 보다 이른 시기에 대한 묘사가 버그스틴 2015에 기술되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온은 종종 정신증 환자 마음에서의 정신증적이지 않은 부분-마치 사고나 소통을 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마음에서 소통을 하려는 측면-의 작동을 강조한다. 즉 환자가 하는 말의 내용이 혼란스럽고 치료자도 혼란을 느낀다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 혼란이라는 것이다.
4
물론 강박성 환자와의 주 작업이 공격성에 대한 갈등인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이면의 정신증적인 영역이 다루어진 후에 비로소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보다 신경증적인 갈등인 경우가 많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환자가 피학적으로 자신을 죄책감이나 언어적 거짓이해로 덮어버릴 우려가 있다.
